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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대원군이 살던 운현궁 고등학교때, 나는 국사 공부를 역사 소설로 했다.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을 읽으면, 국사책에 나와있는 복잡한 근대사를 공부하지 않아도, 조선근대사는 대충 섭렵하게 되니까... ^^; 운현궁은 원래 '궁'은 아니다. 왕이 살던 곳이 아니라,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고, 왕보다 더 큰 권세를 누렸기에, 이곳은 궁이 아닌 궁이 된 것이다. 한때는 지금 쌍문동에 있는 덕성여대가 운현궁을 캠퍼스로 사용했었다.덕성여대는 1950년에 운현궁을 매입하여 캠퍼스로 사용하다가, 쌍문동에 교지를 확보하고, 1984년에 이전을 완료하였다. 현재도 덕성여대 종로캠퍼스가 남아있고, 일부 운현궁 건물들을 사용하고 있다. ==========================.. 더보기
비오는 날의 서삼릉 서삼릉은 희릉, 효릉, 예릉의 3개 능을 일컫는다. 희릉은 조선 11대왕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고, 효릉은 조선 12대왕 인종의 정비,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며, 예릉은 조선 25대왕 철중의 정비,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이외에도 폐비 윤씨의 묘인 희묘,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 등이 이곳에 함께 있다. 중종의 정릉도 원래는 이곳에 있었지만, 1562년 선릉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학교때, 서오릉은 소풍으로 자주 갔었는데, 서삼릉은 그보다 멀어서 그랬는지, 별로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보이스카웃 잼버리를 서삼릉에서 열려서 가본 것이 유일하다. 이후에도 이 근처에는 와도, 서삼릉보다는 그 옆의 원당 종마목장을 가다가 그냥 옆으로 보는 정도..... 그러다가, 비오는 날, 종마목장이 문을.. 더보기
개항시절 외국인 사교장이었던 제물포구락부 구락부(俱樂部)는 원래 클럽(Club)의 일본식 단어이다. 인천 자유공원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제물포구락부는 개항 후, 제물포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1901년에 세워진 건물에는 사교실, 독서실, 당구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13년 외국인 거주지역이 철폐되면서, 이 건물도 용도가 계속 바뀌었다. 현재의 제물포구락부는 2007년 6월 리모델링을 통해 옛모습을 복원하고, 박물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반영 사진만 찍다가 온 다산초당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이곳으로 유배와서 지내던 곳이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원래 다산초당은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다산초당은 다 무너진 건물을 1958년 복원하고, 이후에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만들어진 기와집이다. 그래서그런지, 솔직히 조금은 인위적인 느낌이 더 나는 듯 싶다. 그래서 괜한 반영만 담다가 왔다면, 너무 심한 핑계가 될까... ========================== | 불펌 금지 | ========================== 더보기
황희 정승이 여생을 보낸 곳, 반구정 반구정은 유명한 사진 포인트 중의 하나이다.그곳에 사는 개 한마리와 함께 담은 일출사진이 특히 많이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곳은 그곳이 아니다... ^^ 그 반구정은 경남 함안군 대산면 낙동강변에 있는 반구정이다.서울에서 가는 반구정은 파주 임진강변에 있는 반구정이다. 파주 반구정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정자이다. 이곳은 세종 때 명정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반구정과 함께, 이곳에는 황희 정승을 기리는 사당과 기념관 등이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 불타고, 1960년대에 다시 지은 것들이라, 조금은 많이 아쉽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한때는 비원으로 불렸던 창덕궁 창덕궁은 태종이 지은 궁궐로, 경복궁 이후에 지은 궁궐이다. 한때는 궁이 아닌 그냥 비원으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다시, 옛 이름인 창덕궁을 되찾았다. 비원은 창덕궁의 후원으로, 왕을 위한 정원이었다. 예전에는 창덕궁 전체가 시간에 맞춰서 안내원을 따라서 구경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비원만 예약제로 관람이 허용된다. 경복궁이 정궁이었지만, 많은 왕들이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을 더 선호하였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궐이라고도 불리웠던 창덕궁은 경복궁과 함께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 타버렸다. 이후,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먼저 복원하였고, 창덕궁이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낙선제는 어릴적만해도 들어갈 수 없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여사가 이곳에 계셨기 때문이다. 해방.. 더보기
학이 많이 살았다는 고산정 35번국도에서 농암종택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서 좌측 강건너에 정자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고산정이다. 고산정은 조선 정유재란 당시안동 수성장이었던 금난수가 지은 정자이다.주변 경관이 뛰어나, 이황을 비롯한 학자들의 내왕이 잦았던 곳으로, 이황과 금난수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는 곳이다. 옛부터, 이곳에는 학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가 조학번식비라는 천연기념물비를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학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건너편 암벽에 걸터앉아 낚시를 즐기는 이의 모습이 참 한가로워 보였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조선 왕실의 사당, 종묘 종묘는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유학이 국가이념이던 조선시대, 왕실 사당인 셈이다. 하지만 종묘제도가 중국의 우나라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니, 공자 이후에 생긴 것도 아니고, 반드시 유학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없을 듯 싶다. 지금의 종묘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중국의 제도를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요즘 종묘를 구경하려면, 시간에 맞춰 입장해서 문화재해설사를 따라다녀야 한다. 나쁜 건 아닌 듯도 하지만, 그냥 예전같이 일반 관람도 할 수 있으면 더 사진 담기도 편할텐데... ========================== | 불펌 금지 | ========================== 더보기
동물원에서 궁궐로 복귀한 창경궁 어릴 적, 창경궁은 창경원이었다.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아직도 종종 창경원이란 단어가 익숙하다. 원래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 있던 곳이다.달리 이야기하면, 고려왕조를 무너트린 태종 이방원이 말년에 거처하던 곳이다. 이를 성종이 당시의 대왕대비인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인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해서 지은 별궁이 창경궁이다.하지만,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려, 광해군 시절에 재건되었다. 일제가 1909년 창경궁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며, 이름을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낮추었고,벚꽃나무를 수천그루 심고,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이떄 시작된 밤 벚꽃놀이는 창경궁 복원계획에 따라 198.. 더보기
서산 마애삼존불상 바로 옆, 보원사지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보고 나와, 오던 길로 5분 가량만 더 들어가면 드넓은 폐사지가 보인다.그곳이 보원사지이다. 발굴을 위해 넓은 지역을 파헤쳐놔서, 금새 눈에 들어온다. 그 넓이만 봐도, 과거 보원사라는 절이 매우 큰 절이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발굴된 유물을 통해 보원사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도 남아있는 당간지주의 규모나, 석탑, 등의 흔적과 함께 한때는 1,000여명의 스님들이 수도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유적조사란 것이 그만치 힘든 것이겠지만, 저 퍼런 덮개는 정말 오래도 덮혀있다. 종종 다른 폐사지들도 마찬가지지만, 폐사지 옆에 옛 이름을 이어받아 새.. 더보기
강력한 포대가 주둔하던 강화도 덕진진 덕진진은 강화 12진보의 하나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전력요충지였던 강화도에 설치된 방어시설이다.덕진진은 휘하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의 2개 돈대와 남장포대와 덕진포대의 2개 포대를 관할하고 있었고, 강화해협의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 병인양요때는 덕진진을 통해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미양요때는 초지진으로 상륙한 미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 덕진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남장포대와 덕진돈대를 볼 수 있다. 입장료가 700원이던가..... 갑곶돈대 등을 모두 보는 입장권을 구입하면 조금 할인이 된다고 하던데... ========================== | 불펌 금지 | ========================== 더보기
서울고등학교가 떠나고 복원된 경희궁 지금은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에 있지만, 예전엔 신문로에 있었다. 그곳이 원래는 궁궐이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었는데, 그 궁궐을 복원한 것이 경희궁이다. 원래 경희궁은 광해군이 지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나 경희궁에 들어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숙종, 경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숙종과 영조는 이곳에서 승하했다고 하고, 정조와 헌종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했다고 하니,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07년 통감부 중학이 들어서고, 1915년 경성중학교가 설치되었다. 해방 후에는 서울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부지가 매각되어, 그 규모가 더욱 줄어들었다고 한다.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사하고, 이후, 발굴작업을 하고, 다시 경희궁을 복원하였다.그러다보니, 경희궁의 .. 더보기
대한민국의 중심을 지키는 경복궁 대한민국 사람이면 다들 아는 경복궁,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이후 청와대까지 이 나라 권력의 중심은 경복궁에 있다.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최근에 복원한 경희궁까지 여러 조선 궁궐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궁궐이 경복궁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고 건설한 궁궐이 경복궁이고, 임진왜란 이후, 다시 대원군이 왕권강화를 위해 불 탄 경복궁을 재건한 것도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자 법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적통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에 많은 건물들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중앙청이 자리잡았던 것을, 다시 중앙청을 헐고, 요즘은 옛 건물들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제 강점기도 역사인데, 과연 중앙청을 무조건 헐어버린 것이 옳은 일인지.. 더보기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글귀가 더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은 들어봤는데, 무량수전이 부석사에 있는 줄을 잘 몰랐다는.... ㅠㅠ 그래서 나도 기대서 봤다는..... ^^;;; 676년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의상대사 이후, 여러 신라의 고승들이 화엄경을 공부한 곳이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말로만 듣던 무량수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오늘의 저무는 태양을 맞이한다... 어두워지는 시각, 승방에도 불이 켜졌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전주 풍남문 전동성당 앞에 있는 풍남문 ========================== | 불펌 금지 |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