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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 기록/서울

동물원에서 궁궐로 복귀한 창경궁

어릴 적, 창경궁은 창경원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아직도 종종 창경원이란 단어가 익숙하다.


원래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 있던 곳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고려왕조를 무너트린 태종 이방원이 말년에 거처하던 곳이다.


이를 성종이 당시의 대왕대비인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인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해서 지은 별궁이 창경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려, 광해군 시절에 재건되었다.


일제가 1909년 창경궁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며,
이름을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낮추었고,

벚꽃나무를 수천그루 심고,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이떄 시작된 밤 벚꽃놀이는 창경궁 복원계획에 따라
1983년 7월 일반공개가 중단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나도 예전 소위 야사꾸라라고 불리던 밤 벚꽃놀이를 보러 갔었던 적이 기억에 있다.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벚꽃나무를 모두 없애고,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으로 바꾸고,
옛 궁궐 느낌이 나게 새로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예전에 보이던 건물들은 몇개 없어져 버렸다.

물론, 일제가 지었던 건물로 기억하는데,
그런 건물들을 없앤다고 역사가 바뀌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그것도 역사의 일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름 당시의 건축을 엿볼 수 있는 것을
굳이 역사복원이란 구호로 무조건 부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조선이 건국되고 왕씨들이 싹 사라졌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런 숙청은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춘당지도 일제가 파놓은 연못이다.
예전에 창경원이던 시절, 이곳에서는 보트를 타곤 했었고,
옆에는 팔각정으로 만든 식당이 있었다.


근데, 일본식 건물과 벚꽃나무는 싹 없애면서, 왜 이건 그대로 뒀을까?




창경궁 안의 식물원도 일제가 만든 것이다.

이 식물원은 1909년 국내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온실이다.
당시에는 동양 최대규모여다고 한다.


원래는 이 대온실 뒤에 돔식 온실 2개를 마주보게 세웠었다.
창경궁으로 복원된 후, 한참만에 가서,
옛 기억의 돔식 온실을 찾으니,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잘 부신다... 쩝





원래 종묘와 창경궁, 창덕궁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일제는 맥을 끊는다고, 종묘와 사이에 도로를 만들었다.

그런 거 보면, 일본도 참 미신을 맹신하는 듯 싶다...









우연히 춘당지에서 만난 원앙...

근데, 너희는 어떻게 이 시내 한복판까지 오게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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