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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 양평 용문사 양평 용문산 기슭에 있는 용문사는 913년(신덕왕 2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고려 우왕 때,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교 봉안한 곳이다. 태조 4년(1395년) 조안화상이 중창하였고, 세종 29년(1447년)에는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았다. 수양대군이 임금이 된 세조 시절에는 왕명으로 중개수를 거듭하였던 곳으로 304칸의 건물과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머물던 곳이다. 용문사 앞에는 수령이 1,1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있는데,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세조의 능침 보호를 위해 중창되었던 봉선사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봉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구 본사이다. 고려 광종 20년(969년)에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하여 운악사라고 하였으나, 이후 조선 세종 때, 이전의 7종을 선교양종으로 통합하면서 혁파되었다가, 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를 추모하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중창한 뒤, 봉선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당시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이 해에 범종도 주조되었다고 한다. 1551년에는 선교양종 중,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되어 조선 불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으나, 임진왜란 당시에 전소된 것을 1593년에 주지 낭혜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사찰보다는 봉선사 주차장 옆에 크게 조성된 연밭이 더 눈길을 끌었다. 오리들 노니는 모습을 장노출로도 담아보고... ^^;;;.. 더보기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였으나, 폐사된 성주사지 충남 보령에 있는 성주사지는 신라말에는 전국 최고의 사찰이었던 곳이다. 원래 백제시절에 오합사라는 절로 창건되었으나, 신라말 낭혜화상에 의해 중창되어, 신라말에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사찰로 한때 2,500명 가량의 승려가 머물던 곳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불에 타고, 이후 중건하지 못하여, 현재는 폐사지로 남게 되었다. 현재는 최치원의 사산비문의 하나로 국보 제8호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석불을 비롯한 일부 석조물만 남이있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고려시대 최우의 호국사찰이었던 선원사지 강화도의 선원사지는 선원사라는 사찰이 있던 폐사지이다.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고, 그 옆에 새로이 선원사라는 이름의 절이 들어섰지만,원래 선원사는 얼마전 드라마 '무신'에 나왔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호구사찰로 창건된 사찰이다. 이곳에 팔만대장경 목판을 보관하며, 고려시대에는 순천 송광사와 함께 2대 선사의 하나였으나, 조선 초에 폐허가 되어버린 곳이다. 유적으로 남아 볼 것은 별로 없지만, 이곳 길 건너에는 연밭이 조성되어 있어, 매년 연꽃축제를 치른다. 대개 7월말부터 8월초까지 연꽃이 만개하지만, 초여름에 먼저 피는 수련을 만날 수도 있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봄을 가장 먼저 만나는 곳, 순천 금둔사 순천에 있는 금둔사는 그리 널리 알려진 절은 아니다. 주변에 워낙 유명한 사찰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절이다. 하지만, 이곳은 홍매화가 가장 일찍 피어, 봄을 알려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금둔사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을 뿐이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도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당시에도 금둔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이후 폐사되었다가, 1984년 이후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금둔사는 사찰로 유명하기 보다는 홍매화를 가장 일찍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비록 매화랑 동백만 담았지만, 이곳은 절이다. ^^; ========================== | 불펌 금지 | =============.. 더보기
남한강변의 신륵사 대부분의 절들은 산 속에 있다. 그래서 산길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남한강변에 있는 여주 신륵사는 주차장에서 절까지 그냥 평지다. 그래서 내게는 딱 맞는 절이다... ^^;;; 여주 8경의 하나인 신륵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확지는 않다. 하지만, 고려말 우왕시절에는 200여칸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에는 꽤 큰 사찰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담은 일몰사진,그리고 겨울의 일출과 상고대 사진을 보았지만, 일출은..... 내게는 조금 힘든... ^^;;; ========================== | 불펌 금지 | ========================== 더보기
흔적만 남은 조선 최대의 사찰, 회암사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는 폐사지이다. 지금은 그 옆에 다시 같은 이름의 사찰이 들어섰지만, 원래 이곳은 절터만 남아있던 곳이다. 예전에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이나 '여인천하'에도 등장했던 회암사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 충숙왕때 중창되고, 우왕 떄 중건된 회암사는 대규모 사찰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묵던 곳이기도 했던 회암사는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이성계가 자주 들렀던 곳이기에, 회암사의 구조는 일반 사찰과는 달리,궁궐과 비슷한 구조를 지녔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물론, 효령대군도 이곳에 머물렀었다고 하며, 세종 때의 기솔에 의하면, 1만평의 경내에 250명의 승려가 머물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성.. 더보기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찾아가던 청평사 학교때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가던 청평사... 하지만, 이제는 차를 운전해서 갈 수 있다.화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옛 추억을 생각하며 들렀다. 청평사는 원래 고려 광종때 창건되었다고 한다.처음에는 백암선원이라고 불리었으나, 이후 폐사되었다가, 고려 선종때 이자현이 이곳에 들어와 절을 다시 짓고 문수원이라고 이름을 짓고 선(禪)을 즐겼다고 한다. 이때부터, 주변에 호랑이와 이리가 사라져 평화롭게 되었다고 하여, 청평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억에는 배에서 내려서 금새였던 것 같았는데, 아니네..... 1Km 가량 계곡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통도사의 큰 암자, 극락암 극락암은 통도사 19 암자중 하나이다.통도사에서 1.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극락암은 근현대의 고승인 경봉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였던 1344년에 창건된 극락암은 암자로서는 꽤 큰 규모를 지니고 있다. 특히, 암자 압에 있는 극락영지라는 연못은 뒷편 영취산(영축산)의 봉우리가 비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통도사의 뒷산인 영축산은 그동안 영축산, 영취산, 취서산, 축서산 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이를 2001년 1월 양산시지명위원회에서 영축산으로 통일하기로 하여 공식적으로는 영축산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어떤 자료에는 영축산, 어떤 자료에서는 영취산...헷갈렸는데... ^^; ========================== | 불펌 금지 | ========================== 더보기
강원도 원주시의 거돈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에 있는 거돈사지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히 언제 창건되어 언제 폐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고려 초기, 고려 불교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로서, 꽤 커다란 사찰이었으나, 후에 천태종으로 흡수되었다고 전해진다. 약 7,500평에 달하는 절터의 규모에서도 그 옛날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여주 고달사지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종교가 불교지만,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로 인해 박해를 받았던 종교가 불교다.그런 이유인지, 우리나라에는 사찰도 많지만, 잊혀진 절터, 즉 폐사지도 참 많다. 고달사지는 말 그대로 고달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고달사는 서기 764년 신라 경덕왕 시절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광종을 비롯해 여러 왕들의 비호를 받았고, 사방 30리에 걸쳐 수백명의 스님들이 머물었었다는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폐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이 없다. 지금도 발굴조사의 흔적과 드넓은 터만 남았을 뿐이다... ========================== | 불펌 금지 | ========================== 더보기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았던 칠장사 경기도 안성 칠현산에 있는 칠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서기 636년(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며. 이후 고려 현종 5년에 혜소국사 중창한 사찰이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불탔으나, 조선 중종 때 다시 중건되었다.이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인목대비가 자신의 아버지인 김제남과 아들인 영창대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창하였으나, 이후에도 불에 타고, 다시 중건되기를 반복한 곳이다. 또한, 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던 도중에 이곳에서 하루 묵으며 기도를 한 후, 꿈에 혜소국사가 나타나 과거시제중 7행을 읊어주었고, 나머지 1행을 채워 장원급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매년 입시철이면 학.. 더보기
십리벚꽃길로 유명한 하동 쌍계사 매년 남쪽의 꽃소식이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준다.남쪽 꽃소식 중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벚꽃이다. 밪꽃축제는 당연히 진해군항제가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벚꽃만큼이나 사람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그보다 조금 덜할지는 몰라도, 화계장터에서 쌍계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쌍계사 십리벚꽃길도 그에 못지않다. 대개는 차를 타고 지나다보니, 사람에 치이는 것은 조금 모면해보지만,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차가 밀려 고생이다. 광양 매화마을에 간 김에 쌍계사까지 들렀었다. 하지만, 나오는 길이 너무 밀려, 다른 일정이 다 망가져버렸다... ㅠㅠ 쌍계사가 벚꽃에 밀린 느낌이지만, 쌍계사도 큰 절이다. 벚꽃이 다 진 후에도 들르게 되는 곳이 쌍계사이다. 쌍계사는 신라시대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이 창건한 고찰이며, 현재 .. 더보기
서산 마애삼존불상 바로 옆, 보원사지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보고 나와, 오던 길로 5분 가량만 더 들어가면 드넓은 폐사지가 보인다.그곳이 보원사지이다. 발굴을 위해 넓은 지역을 파헤쳐놔서, 금새 눈에 들어온다. 그 넓이만 봐도, 과거 보원사라는 절이 매우 큰 절이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발굴된 유물을 통해 보원사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도 남아있는 당간지주의 규모나, 석탑, 등의 흔적과 함께 한때는 1,000여명의 스님들이 수도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유적조사란 것이 그만치 힘든 것이겠지만, 저 퍼런 덮개는 정말 오래도 덮혀있다. 종종 다른 폐사지들도 마찬가지지만, 폐사지 옆에 옛 이름을 이어받아 새.. 더보기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상 교과서에서도 배우는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 마애삼존불상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ㅠㅠ 여튼,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 중국과 교역을 하던 주요 거점지역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냥 그런 시골이지만, 당시에는 꽤 번화했던 지역이다.바로 옆의 보원사지의 규모가 그를 대변한다.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나는 마애삼존불이란 것이 부처님 이름인 줄 알았었다.하지만, 마애(磨崖)는 '갈 마' '벼랑 애'삼존불상은 부처와 양측의 보살을 포함한 3개의 불상을 의미한다. 즉 벼랑을 갈아서 만든 3개의 불상이다. 서산 바로 옆, 태안에도 태안마애삼존불상이 있는 것을 지나다니면서 안내판만 봤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언제 한번 들러서 비교라도 해보면,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멋을 알 수 있으려나... 요즘도 종종 이쪽을 .. 더보기